[기독교 깨기] 하나님은 왜 이토록 자유를 연약하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기독교 깨기] 하나님은 왜 이토록 자유를 연약하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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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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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자유의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하셨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 아담와 하와의 타락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죄는 똬리를 틀고 죄가 죄를 낳는 악순환이 지속되어 급기야 자신의 동생 아벨을 질투한 가인은 인류사 초유의 살인죄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는 살인과 강도, 강간 같은 강력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처럼 세상에 편만한 악을 볼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고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들에게 자유를 기꺼이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단지 자유를 위해 이처럼 너무 많은 악과 고난들을 거는 창조주가 과연 지혜로운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자유는 과연 이 모든 모험들을 감수하고도 고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히틀러나 김일성 같은 악질적인 독재자들이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위험 부담을 안은 채 자유를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치고는 상당히 서툰 경영인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자유를 연약하고 미약하게 만들어 악인 한 명의 의지가 수백만의 자유를 빼앗아가도록 하셨단 말인가?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악과 고통들을 감내할 정도로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마 아우슈비츠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유대인들에게 물어본다면 히틀러의 소중한 자유의지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대략 4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변호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는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비례해서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가지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에 정확히 비례해서 그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여러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면 마찬가지로 그는 그 사람들 모두에게 상처를 줄 자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세상을 관찰해보면 분명 악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히틀러나 차베스, 스탈린 같은 인물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테레사 수녀, 아브라함 링컨, 마틴 루터 킹 같이 일평생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이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세상 경영 방식이 여전히 서툴러보인다고 지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항상 사랑과 선행이 넘치고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다른 방법은 없다. 자유 안에 내재해 있는 선과 악의 잠재력 사이의 비례를 우리는 형이상학적 진리라 부른다. 비유컨대 이것은 삼각형의 세 변과도 같아서 진정한 자유를 가지려면 동시에 이러한 위험 부담도 가져야 되는 것이다.

둘째, 사랑은 이 모든 악들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인간들조차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연인을 사랑하면서, 친구와의 우정을 쌓으면서, 자식을 키우면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인간은 사랑을 하면서 고통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을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부모에게 반항을 한다고 해서 자식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만약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비겁하고 소극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어떤 사람이 상처가 두려워 타인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가 사랑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받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생명력을 상실한 메마른 인간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 계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의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사랑이 가능한 세상을 창조하시기를 거부하셨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명제에 대한 모순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이유이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자유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다. 자유는 단지 사랑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이것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일 뿐이다.

셋째,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창조에 수반된 위험은 인간들만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신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현재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인간의 악으로 인해 가슴 아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고통을 느끼시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호세아서를 통해 당신을 순결하지 않은 아내와 결혼했으나 끝까지 그 아내를 사랑하는 분으로 묘사하신다. 아내는 몸을 팔기도 하고, 남편의 사랑을 거부하기도 하고, 자식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고통들을 참으면서까지 자기 백성들이 참회하고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께로 올 수 있도록 부르시는 분이다.

창조에 수반된 하나님의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부모라도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들을 영원한 안식처로 부르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누구보다 더 많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형벌이라는 극형까지 당하시며 결국 목숨을 내어주셨다. 꼭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었지만 오로지 사랑으로 하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목숨까지 내어줄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유배 중이던 당시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살았던 자신의 교만한 과거를 깊이 뉘우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넷째,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 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영광스러운 삶과 비교하면 아주 짧은 것이기 때문에 자유는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만약 이 땅에서 수십 년 사는 인생이 전부라면 악을 남용할 수 있는 자유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악이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원천적으로 차단하시고 인간을 기계처럼 하나님만 찬양하고 선한 일만 행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으시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간은 기쁨과 사랑, 평안만이 존재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묘사한다.(“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8장 18절)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유대인들의 삶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천국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되어야 하며 성경은 실제로 그러하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영원한 세계가 없다면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세계가 없다면 인생은 그야말로 순전한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꿈과 소망, 열정, 투혼, 분투는 죽으면 완전히 사라지고 말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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